스태그플레이션과 자본주의의 모순
자본주의와 스태그플레이션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뉴스는 연일 물가상승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이런 가운데 IMF는 지난 4월에 이미 41개국이 디폴트 위기에 있다고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각각 경기 성장이나 하락에 별도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스태그플레이션은 물가가 오르면서 경기후퇴가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말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비합리적인 상황을 전쟁이나 유가등 여러 외부 요인을 통해 원인을 파악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런 외부 요인들은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자본주의 시스템과 미국의 달러 패권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을 알아야 한다.
물가는 본질적으로 화폐의 문제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물가상승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엄청난 돈이 풀렸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나타났던 스태그플레이션도 지금과 매우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1971년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 포기를 선언하면서(고정환율제의 붕괴) 시장에 화폐를 마음껏 유통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당시 닉슨과 미국의 중앙은행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중에는 엄청난 돈이 풀리고 경기는 호황국면으로 접어들었다.(아니 그렇게 보였다)
문제는 물가였다. 추가적인 정부지출로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했다. 기업은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물건 값을 더 높게 책정해야 했다. 높은 물건 값은 다시 정부의 구매력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정부는 다시 더 많은 돈을 찍어내는 식으로 대응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동에 전쟁이 터지며 원유가격이 인상되기 시작했다. 1차 오일쇼크가 터진 1793년부터 세계 경제는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전 세계의 물가는 계속해서 상승했고, 이는 실질소득 하락과 소비 감소로 이어졌다. 경기는 침체됐는데 물가만 계속 오르는 상황, 즉 스태그플레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금본위 통화체제가 불태환 지폐시스템으로 바뀜에 따라 일반적인 경제학의 법칙이 변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1979년 2차 오일쇼크를 지나 1981년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폴 볼커에 의해)기준금리를 연 20% 이상으로 올리는 초강수를 두고 나서야 점차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10년에 가까운 시기동안 미국과 전 세계를 고통에 빠뜨렸고, 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금리 인상은 경기의 회복 과정까지 수많은 기업들의 도산과 실업자를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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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같은 현상은 정부와 중앙은행의 역할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모두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예를 들어, 경기가 어려워지면 정부지출을 늘리거나 금리를 인하하는 등의 정책으로 경기침체의 효과를 줄이거나 없앨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요관리(Demand Management)'에 기반한 케인스주의가 있었다. 케인스는 대공황이 한창인 1935년에 저서인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경기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효율적 시장이론'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한 나라의 경제가 장기침체의 덫에 빠졌을 때, 정부는 세금 부과 없이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적자를 감소하고라도 지출에 착수해 수요적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즉각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각국의 정치인들은 기존의 경제학적 관점을 뒤집는 새로운 연금술(정부의 지출 = 경기의 회복)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뉴딜정책의 성공(진정한 의미의 성공이었는지는 지금도 의견이 갈리지만 정치인들에게 사실보다는 의미가 중요하다)으로 공황을 극복한 사례는 케인스주의 정책에 힘을 실어줬다.
이제 각국의 정부는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본래 케인스의 정책은 경기가 후퇴기에 접어들어 경제활동의 전반적인 수준이 심각하게 위축되었을 때 쓰도록 제안된 것이었지만 정책입안자들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금융 부문의 위기를 막기 위한 공세적인 정책은 대체적으로 경기후퇴를 피할 수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성공이 반복되면서 '양성(+)피드백'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이제 막 나타나려고 하는 경기후퇴를 매번 성공적으로 차단함에 따라 민간 부문의 채무자들은 점점 더 공격적으로 변화하고 투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결국 엄청난 부채더미를 기꺼이 떠안고 마는 것이다.
※ 양성(+) 피드백 시스템에서는 어떤 시점의 한 사건이 가까운 미래에 똑같은 사건을 더 많이 일어나게 만든다. 즉 오늘 자금을 인출하는 투자자들이 내일 더 많은 투자자들로 하여금 자금을 더 인출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한국의 영끌 족들과 부동산 가격의 폭등 또한 양성 피드백의 현상 중 하나다.
이건 과도한 부채와 함께 경기의 과열을 가져온다. 부풀어 오를대로 오른 잠재적 위기는 내부적 요인 뿐만 아니라 몇 가지 외부 요인과 겹치며 전혀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경제적 현상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1970년대 오일쇼크와 함께 발생한 스태그플레이션은 과도한 재정지출과 이로 인한 물가 상승을 각국의 정부와 중앙은행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벌어진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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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상황은 사실 스태그플레이션이냐 아니냐는 논의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금융 시스템의 모순이 곪을대로 곪다가 터져버리는 자연적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은 매번 이런 상황이 되면 최대한 시장의 고통없이 경기의 연착륙을 위해 정책을 편다고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이런 금융제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기관이라 말하지만 단 한번도 시장은 그들의 말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현대 금융시장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고통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고름이 썩어문드러지기 전에 고름을 터뜨리거나 직접 터지게 놔두어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악역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다.
※ 과거 폴 볼커는 금리를 올려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고도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지만 돈을 미친듯이 찍어낸 벤 버냉키는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한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그리고 지난 6년 간 미국의 양 당을 대표하는 두 대통령은 재정지출로만 5조 달러 이상을 기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플레이션과 그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케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과정을 통해 정부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비밀스럽게 시민들의 재산 중 중요한 부분을 몰수할 수 있다. (…)
확실히 레닌이 옳았다. 기존 사회의 기초를 뒤흔드는 가장 교묘하고 확실한 수단으로,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는 것만 한 것이 없다. 그 과정은 경제적 법칙에 숨겨져 있는 모든 힘을 파괴쪽으로 밀어넣는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평화의 경제적 결과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