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의 고전 <한비자>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한비자>는 패도를 옹호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오해 1>.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한비자가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제자였던 만큼 '인간의 본성은 선(善)한가'라는 명제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비자는 순자의 유가적 교리를 그대로 계승하지 않았다. 그는 성선설이나 성악설로 대표되는 선악의 개념, 즉 도덕적 관점에서 한 발짝 벗어나 생물학적 원리로 인간을 해석했다.
'사람은 뱀을 보면 깜짝 놀라고 큰 벌레를 보면 소름이 돋는다. 그렇지만 아낙은 누에를 손으로 줍고 어부는 장어를 움켜쥔다. (이러한 이치는) 이득이 있는 곳에서는 싫어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모두 맹분(孟賁)이나 전저(專諸)처럼 용감해지기 때문이다.'
<한비자>, 內儲說 上
※ 맹분과 전저는 중국 고대 사람의 이름으로 용감한 사람을 뜻함
한비자는 인간 사회의 기본 원리가 이익, 즉 개인들의 '이기심'이 작동한 것이라 보았다. 예를 들어, 커다란 나무가 주변 작은 나무들의 햇빛을 막아 홀로 높이 자라는 건 나무가 악해서도 선해서도 아니다. 이건 생물의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하나라 때의 명궁이 깍지를 끼고 활시위를 당기면 관계가 소원했던 월나라 사람들도 다투어 과녁을 잡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 자식이 활을 잡으면 이 아이의 어머니라도 방으로 도망쳐 문을 닫아버리고 말 것이다.'
<한비자>, 說林 下
이득이 확실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서로를 의심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게 부모라도 자식을 피한다. 이 같은 한비자의 철학은 인간을 일종의 생태적 질서로 인식한 데이비드 흄이나 아담 스미스보다도 무려 천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오해 2>. 형벌로 인간을 억압한다
한비자가 인간의 본성을 자연 현상의 한 과정으로 본 것은 그가 노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한비자> 철학의 정수로 여겨지는 '해로'(解老 : 노자를 풀이하다) 편에 자세히 나온다.
'도(道)'란 만물이 존재하는 근거이며, 모든 이치가 모여서 합쳐진 것이다. '이치(理)'란 사물의 갖춰진 모양이고, 도는 만물이 성립되는 근본이다. (…) 무릇 도의 실체는 규제를 받지 않고, 형체가 없으면서 부드러우며 연약하게 때에 따라 규율과 서로 응한다.'
<한비자>, 解老
※ 한비자의 스승인 순자는 맹자와 대립적인 인물이었지만 모두 유가의 대표 학파라는 점에서 공자를 계승한다. 이에 반해 <한비자>에는 공자를 비판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실려있는데, 이는 유가의 개념들이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대표적으로 충의 개념)이 많아 시스템에 부작용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한비자는 순자의 유가를 계승 발전시키기 보다 유가에서 발생한 문제의식을 통해 노자의 도가철학과 기존에 존재하던 법가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해 한비자만의 새로운 현실주의 정치 사상을 완성시켰다고 봐야 한다.
노자의 '무위'란 인위적이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도'(道 - 여기서 道는 만물의 이치와 깨달음을 함축한다)로 대표되는 사물은 '물'이다. 물은 순환하고 변화하며 거스르지 않는 특성으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도는 비유하면 마치 물과 같다. 물에 빠진 자가 물을 많이 마시면 익사하지만, 갈증이 난 자가 알맞게 물을 마시면 살아난다.'
<한비자>, 解老
그리고 이러한 이치는 우주적 질서이기 때문에 한비자는 정치 시스템도 그와 비슷하게 운영돼야 한다고 보았다. 국가의 정치도 이치에 맞게 통제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만드는 것, 즉 규율을 통해 자연스러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군주가 할 일이다.
'도는 규율이다. (…) 만물에는 저마다 규율이 있으므로 서로 침범할 수 없다. 만물에는 규율이 있어 서로 침범할 수 없기 때문에 규율이 만물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한비자>, 解老
따라서 한비자에 따르면 올바른 제도와 법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자연스럽고 평온하다.
'법과 제도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인위적인 법은 지켜질 수 없다.'
<한비자>, 用人
한비자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당시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한비자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한비자는 '인위적인 법'은 지켜질 수 없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건 기존의 강력한 법치주의를 지향하던 <상군서>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진나라가 망한 가장 큰 원인은 엄밀히 말해 한비자가 아니라 당시 진나라의 재상이자 같은 순자의 제자였던 '이사'의 공이 더 크다.)
<오해 3>. 패도 정치를 지향한다
자연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이치에 맞게 움직인다. 한비자는 국가 또한 한 명의 능력에 기대 국정이 운영되는 것을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로 보았다. 이는 한비자가 왕도(王道) 정치를 표방하는 유가를 비판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무릇 사물에는 마땅한 곳이 있고 인재에는 쓰일 곳이 있으니, 각각 제자리를 찾아 두면 임금은 할 일이 없다. 즉 무위의 경지에 이른다. (…) 임금이 잘나면 일이 바르게 되지 않는다.'
<한비자>, 揚權
한비자는 '임금이 잘나면 일이 바르게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뛰어난 인물 한 명에게 의존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 것이다. 정치 시스템도 자연처럼 스스로 알아서 작동하게 하는 것, 한비자는 이를 '무위의 경지'라 표현했다.
'성군인 요왕과 순왕, 폭군인 걸왕과 주왕은 천 년에 한 번 나는 것이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뒤꿈치를 좇아 잇달아 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끊임없이 중간치의 인물들이 되는데, 내가 말하는 권세는 이러한 중간치의 인물들에 대한 것이다.'
<한비자>, 亂世
한비자에게 군주란 정치 시스템에서 하나의 기능을 담당하는 최상위의 '부품'일 뿐이다. 따라서 전체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설령 군주라 할지라도 시스템을 넘어서는 능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건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피터 드러커가 조직 관리에 대해 언급한 부분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조직은 천재에게 의존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천재의 공급은 늘 부족하고 또 언제 공급될는지 전혀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일을 하도록 하고, 구성원들이 가진 역량이면 그 무엇이라도 이끌어내고는 구성원들 모두가 그것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그리고 보다 더 큰 성과를 이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조직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경영의 실제>, 13.
한비자가 조직을 보는 관점은 그가 '엘리트주의'를 옹호한다는 비판과는 전혀 반대되는 주장이다. 마치 하나의 완성된 기계처럼 시스템과 기능에 집착하는 그의 정치철학은 오히려 현대의 조직관리 이론과 더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