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푸가 한국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던 이유
협상의 승패를 좌우하는 배트나의 힘
배트나란(BATNA)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대안을 말한다.(참고 : 전세를 뒤집는 협상의 기술 '배트나(BATNA)'란 무엇인가?) 협상 전문가들은 배트나를 가장 기초적인 협상 전략으로 활용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배트나는 협상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기 때문에 협상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협상 전, 배트나를 개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배트나의 우위가 곧 협상의 성공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의 한국까르푸 매각 협상 사례는 배트나의 위력을 아주 잘 보여준다.
프랑스의 할인점 체인인 까르푸는 2006년 한국에 있는 모든 점포를 이랜드에 팔고 완전히 철수했다. 그런데 업계에서 입을 모아하는 이야기는 그들이 아주 좋은 값을 받고 성공적으로 매각했다는 것이다. 사실 까르푸는 한국 내 흥행에 완전히 실패한 기업이다. 망해서 철수하는 기업이 어떻게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을까? 배트나를 끊임없이 개선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적절히 알린 덕분이다.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
<사진 : 셔터스톡>
1996년 한국에 진출한 까르푸는 처음 포부와 달리 10년 가까이 한국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세계 2위의 할인점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에 밀리는 형편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까르푸는 2005년 내내 롯데마트와의 합병설에 시달렸다. 한국까르푸는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부인했지만, 사실 물밑에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5년, 합병설에 시달리던 한국까르푸는 시장에서 전혀 뜻밖의 모습을 보였다. 회사를 팔아 치울 것이라는 시장의 예측과 달리 점포 수를 계속 확대했던 것이다. 2005년 3월에 27개에 머물렀던 한국까르푸의 점포 수는 지속적인 개점을 통해 2006년 매각 시점에는32개로 늘어나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회사가 왜 점포 수를 늘렸을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은 배트나의 개념을 생각하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당시 롯데마트 측과 물밑 협상을 추진하던 한국까르푸는 이미 일본 시장 퇴출 과정에서 거의 헐값 수준으로 회사를 매각했던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긴 까르푸 경영진은 어떻게 하면 한국까르푸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가치를 높게 평가받으려면 인수 의향을 가진 기업들이 많아 경쟁이 벌어져야 하는데, 당시 한국까르푸 인수에 관심을 가진 기업은 롯데마트가 고작이었다. 한국까르푸는 배트나를 개선하기 위해 할인점 업계 국내 1위였던 신세계 이마트를 끌어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마트 입장에서 롯데마트가 한국까르푸를 인수해도 별로 타격받을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이마트는 이미 전국에 70여 개 점포를 확보하고 있었고, 신규 점포 준비 상황도 많이 앞서 있어서 롯데마트와 한국까르푸의 합병이 업계 1위 사수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한국까르푸는 이러한 이마트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궁리했고, 그 결과로 나온 조치가 바로 신규 점포 개점을 통한 규모 확대였다. 즉, 롯데마트와 한국까르푸가 합병할 경우 1위인 이마트와 격차가 근소해지도록 만들면 이마트가 불안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까르푸의 생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매각이 공식화되자 이마트도 본격적으로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한국 까르푸는 2005년 한 해 동안 점포 수를 크게 확대함으로써 롯데마트와의 협상에서 이마트를 자신의 배트나로 개발한 것이다.
한국까르푸 매각 협상에서 더욱 재밌는 현상은 이마트가 참가한 다음에 나타났다. 한국까르푸의 배트나가 된 이마트 역시 스스로 배트나를 개발해 한국까르푸를 압박했다. 당시 한국까르푸와 마찬가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월마트를 설득하여 인수를 추진한 것이다. 이마트가 월마트 인수하면 한국까르푸와 롯데마트 합병은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월마트 인수 작전은 이마트에게 아주 강력한 배트나 되었다.
이마트가 월마트 인수를 추진함으로써 이마트가 배트나로서의 효력이 떨어지자, 한국까르푸는 또다시 새로운 배트나를 개발했다. 의류업체로 성공을 거두고 점차 유통업으로 사업 확장을 시도하고 있던 이랜드를 협상 무대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랜드의 등장으로 매각 협상은 다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결국 한국까르푸는 이랜드에 매각되었다. 이 협상 과정에서 한국까르푸가 롯데마트를 배트나로 활용하였음은 물론이다. 한편 이마트는 월마트를 인수하면서 부동의 1위 자리를 굳혔다.
한국까르푸 매각 협상은 끊임없는 배트나 개선이 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중요한 사례다. 배트나를 활용한 협상전략에서 주의할 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배트나를 알려서 상대를 압박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반대로 나의 배트나가 좋지 않을 때는 가능한 한 그것을 숨겨야 한다. 상대방이 나의 배트나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 순간 훨씬 더 야박하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협상 전문가들은 어떤 식으로 배트나를 개선할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협상이 상대방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부터 진행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협상은 협상을 결정짓는 당일이 아닌 안건이 나온 순간부터 진행된다. 협상의 고수는 협상 테이블에 도착하기 전에 치밀한 사전조사와 분석을 통해 최대한 많은 대안을 마련한다. 협상 전, 적어도 손해 보는 옵션을 없애는 것, 이것이 배트나의 핵심이다.
한국까르푸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었던 상대를 지속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과의 협상에서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은 내부 담당자들이 한국 시장에 대한 치밀한 사전조사와 분석이 있었던 덕분이다.
"협상은 준비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싸움이다. 언제나 준비된 사람이 이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다."
- 이상웅 (주)세방 부회장